아버지의피눈물로 당신의

내가 작가와 문학의 옳음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문학이 인간의 생각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그것을 너무 알고 문학과 예술을 이용해 사회를 앞장선다.

그 한 예가 최근 페이스북에서 화제가 된 시다.

언제 어디서 방송했는지는 모르지만 방송인 오미희가 멋진 목소리로 아버지의 눈물이라는 시를 낭송했고, 그 순간 출연자들이 눈물바다를 만들었다고, 이를 본 시청자들도 감동받았다고 곳곳에서 공유한 시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읽어봤어 하지만 나는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되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화를 내는 독자가 있을 수 있지만 잠시 감동을 누그러뜨리고 화를 풀면서 왜 감동했는지 생각해 보라. 그런 시는 그저 패배자, 비겁자의 변명일 뿐이 아닌지, 지금 이 혼탁한 사회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기 바란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남자로 태어나도록 잘살고 싶었던 옳은 것은 옳고, 잘못된 것은 그르다고 당당하고 정의롭게 남자답게 살고 싶었다.

(전문은 각자 찾아보세요)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꿈꾼다.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아버지가 꼭 그런 분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이 아버지가 살아온 여러 삶에서 우리가 존경하는 아버지는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나쁜 것을 그르다고 하며, 세상과 싸운 아버지이다.

그 신념을 지키려고 노력한 아버지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그런 삶을 배우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본받으려 한다.

그러나 세상은 당연히 그런 정직성만으로 살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괴롭다.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세상과 싸우다 만신창이가 돼 패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이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이에게 정직하게 살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정직하게 진실되게 살아야 한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이 된다고 말했다.

그런 아버지야말로 진짜 남자다운 남자, 아버지다운 아버지다.

자식은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이렇게 말해 이런 감동을 주는 것이 진정한 문학이자 진정한 문학의 역할이며 진정한 문학의 의무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아버지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

용기가 없어 옳은 일을 옳거나 잘못해서 못한 비겁함을 자신이 아버지이자 남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이 남자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나만 바라보는 처자 때문에 비굴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며 울먹인다.

술을 마시면서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킨다며 비극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아버지 인생이 불쌍하지 않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아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비겁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본받을 수는 없다.

비겁하게 살며 처자를 먹여 살린 가장은 애처로울 수 있지만 옹호할 수는 없다.

어리석어도 사랑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 처자를 위해 비겁하게 살아야 했다는 아버지에 동조하기는 어렵다.

옳은 것을 옳다고, 나쁜 것을 그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당당한 남자, 정의로운 남자로 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비겁함 때문이지 처자 탓이 아니다.

아버지든 어머니든, 여자든 남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부모든 아이든, 착실한 사람이면 옳은 것은 옳고 나쁜 일을 그르쳤다고 하면서 당당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임을 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아버지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애꿎게 감옥살이를 한 사람도 있고, 지금도 그 정직한 입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도 많다.

반면 바른 것을 옳지 않은,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해 온 사람들, 틀린 것을 안 하거나 계산해 보면 말하지 않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알고 아첨을 늘어놓은, 비겁하고 교활한 많은 아버지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얼마나 해괴하고 추악한 세상에 살고 있을까.

남자보다 강한 게 아버지 맞아. 그러니까 자식한테는 단 거 말고 쓴 것도 먹이는 사람이 아버지다.

옳은 것을 옳다고, 틀린 것을 그르다고 하는 바람에 실패한 삶을 살았더라도 너는 잘못 살아라, 말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래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게 강한 아버지다.

자신이 고생했다고 해서 어떤 훌륭한 아버지가 당신은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말라, 틀린 것을 그르다고 말하지 말라, 아닌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칠 것인가.

자신이 힘들어도 우리를 제대로 가르쳐준 아버지요, 돈이 아니라 진실을 유산으로 남겨준 아버지라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게 아이들이다.

옳은 것을 옳다고, 틀린 것을 그르다고 하는 바람에 세상에 버려진 그날 밤 소주잔을 기울이는 아버지를 떠올리면 칼로 도려낸 듯 아이의 가슴 아픈 것이다.

이 시는 자꾸 모순되는 만큼 처자를 위해 옳고 그른 것이 옳고 그른 것이 그르다고 할 수 없다면 부귀영화를 가져와야 한다.

자존심 다 버리고도 비굴하게 살았는데 옷 제대로 안 입고 제대로 된 집 하나 없단 말이야 그냥 무능한 아빠야 그렇다면 후회해야 한다.

어차피 이렇게 살 것을, 옳고 그름을, 그름을 그르다고 했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울어도 아무 말 없이,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면 목이 메는 것은 그가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비록 처자를 잘살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바른 아내, 바른 아이라면 그런 남편을, 그런 아버지를 사랑한다.

우리가 아버지를 흠모했던 것은 비겁하게 살아서 처자를 잘 살게 해 준 것이 고마워서가 아니다.

아버지의 삶이 무겁고 안타깝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현실에선 사표를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이고 가장이기 때문에 옳은 것을 옳다고 할 수 없고, 잘못된 것을 그르쳤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생각이 나서 목이 멘 독자가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시가 말하는 주제가 뒤틀려 있다는 것이다.

이 시는 아버지를 업고 세상이 비겁함만 강요한다며 인간의 비겁함을 비호한다.

삶에 대한 비굴함을 굳이 아버지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시인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어떤 의도로 썼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이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그저 얄팍한 인간의 감성을 건드릴 뿐이다.

그 결과 인간의 용기 없는 일, 인간의 비겁함을 아버지의 자식 사랑과 가장의 무거운 삶 때문이라고 변명하면서 이 시대의 왜곡을, 수많은 비리와 혐의를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즉, 이 시는 정직하고 용감하게 살아온 모든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다.

아버지의 피눈물로 자신의 비굴함을 정당화하지 말라.용감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모독하지 말라.

아버지의 눈물